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화도 방어전 (문단 편집) ===== 병정기사와 답정판서서 ===== 조익은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당시, 인조를 호종하는 임무를 내팽개치고 강화도로 도망친 인물이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1502020_004|인조 15년 2월 20일 경인 4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07022_003|인조 16년 7월 22일 계미 3번째 기사]][* 여담이지만, 이러한 죄로 인해 조익은 호란이 끝난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된다. 그러나 강화도로 도망친 이유가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다는 점,(아들 진양으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를 강화로 모시게 했는데 도중에 아버지가 실종되었다.) 아버지를 도피시킨 뒤 윤계, 심지원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했다는 점 등이 참작되어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원손보양관으로 제수되었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그 뒤로도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상복을 벗은 후에야 좌참찬으로 조정에 나갔다.(1648) 이러한 점을 볼 때, 조익은 제 목숨 아까워서 꽁무니를 뺀 김경징 같은 부류와 동급으로 칠 만한 인물은 아니다.] 이 때문에 포저집(이하 병정기사)[* 포저집은 조익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2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손자들인 조지항, 조지정 등이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전후의 체험을 서술한 것은, 포저집에 수록된 기록 중에서 병정기사에 해당한다.]은 조익이 자신의 행적을 변명하기 위해 작성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자료이다.[* 김경징에게 불리한 내용은 일부러 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조익은 인조를 호종할 임무를 포기한 채 강화도로 도망쳐 왔기에 떳떳한 입장이 아니었고, 반정공신 김류는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김경징은 그의 아들이었다. 조익은 보신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고, 권신의 아들에 대해 나쁜 기록을 남기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행위였다.] 이는 파직된 조익을 변호하기 위해 이시백이 올린 [[http://sillok.history.go.kr/id/kpa_11612030_002|상소]]의 내용이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21A_0250_010_0020_2006_004_XML|병정기사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 병정기사에는 ‘김경징은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서류를 결재하는 데 최선을 다했고 강화도의 방비가 허술한 점에 안타까워했다.’는 내용이 없다. 병정기사에 따르면, 조익이 3일 내내 지켜보았지만, 김경징도 이민구도 안에 틀어박힌 채 일하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적이 코앞까지 와 있는 상황인데도. 또한 강화도의 방비가 허술한 점을 안타까워 한 것 역시 김경징이 아니라 조익이었다. 김경징은 그의 말에 맞장구친 게 전부였다. 이런 내용들은 김경징을 옹호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안에 틀어박혀 일하는 척이나 하면서 잡담 나누고 눈물이나 질질 짜는 게 검찰사의 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민구는 병자호란 당시 검찰 부사로 강화도에 있었는데, 청군이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지자 도망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병자호란 이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영변으로 옮겨졌다. 조정에서는 ‘그의 재능이 뛰어나니 서용(敍用)하자.’는 건의가 여러 번 있었지만, 강화도에서의 행적과 이후의 처신이 문제가 되어 번번이 취소되었다. 그는 만년에 친구 정세규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는 형식으로 답정판서서(答鄭判書書)[* 직역하면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정도가 되겠다.]를 작성하여 강화도 방어전 당시 자신의 행적을 이야기했다. 위의 항목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주집(이하 답정판서서)의 기록이 바로 이 답정판서서이다. 이민구는 조정에 다시 나가기 위해 강화도의 일을 적극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답정판서서는 이민구가 병자호란 당시 자신의 행적을 변호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실제로 해당 기록에서 그는 ‘검찰(강도검찰사, 검찰부사의 업무)은 싸우는 일이 아니다.’ ‘강화도의 일은 우리(김경징, 이민구) 관할이 아니라 장신의 관할이었다.’ ‘장신은 청군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 보고 경계를 소홀히 했다.’ ‘김상헌이 김상용의 행장과 비문에 적은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청음 김상헌이 쓴 김상용의 신도비명에 “공(김상용)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이르기를 ‘행재소가 포위된 지 오래 되었다.……강화도에 검찰사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니 부검찰사(이민구)가 마땅히 호서로 가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의병들을 모으며, 호남의 군사들 가운데 후방에 있는 이들을 독려하여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군부에게 달려가야 한다. 이 일은 지체할 수 없다.’라고 하셨는데 이민구가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았다.(公奮謂行在受圍日久.……江都檢察一人足了, 副使宜往湖西, 收散卒糾義旅, 督湖南兵在後者, 以赴君父之急, 機不可緩, 敏求涕泣不行)”라고 하였다. 《淸陰集 卷26 伯氏議政府右議政仙源先生神道碑銘 幷序》]라고 주장하며,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죄를 모조리 장신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등,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또한 해당 기록에 등장한 인물들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이미 사망하여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없거나,]] 혹은 [[유유상종|이민구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행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337A_0340_030_0040_2017_006_XML|#]] 때문에 병정기사와 답정판서서는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현장에 있던 사람의 저작이니, 전투에 대한 내용은 신뢰할 가치가 있지만, 당시 그들과 그 주변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와 대조하여 확인할 필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